管鮑之交 관포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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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鮑之交 관포지교[편집]

   대롱 관      절인 물고기 포      갈 지      사귈 교  

관포지교(管鮑之交) 관련 설명[편집]

매우 다정하고 허물없는 친구 사이  관포란 제나라의 관중과 포숙아를 말한다. 두 사람은 죽마고우로 가까운 친구였다. 관중은 소홀과 함께 양공의 공자인 규의 측근자가 되었고, 포숙아는 규의 동생인 소백의 측근자가 되었다.양공은 바탕이 가라앉지 않은 사람이어서, 이윽고 종제인 공손무지의 반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죽임을 당했다. 관중과 소홀은 규를 받들고 노나라로 망명했고, 포숙아는 소백을 받들고 거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윽고 공손무지가 반대파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제나라의 왕위는 비어 있었다. 규와 소백은 형제이긴 했지만, 먼저 제나라로 돌아온 쪽이 왕위에 오른다는 정적의 사이가 되었다.규는 서둘러 귀국하려 했지만, 격식이 높은 유서 있는 노나라에서는 무엇이나 행동이 제한되어 생각대로 되지 않는 반면에, 소백은 작은 나라인 거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제약이 없이 신속하게 행동하여, 곧바로 제나라로 향하여 출발했다.이와같은 정보를 얻은 관중은, 왕위에 규를 앉히기 위해서는 소백을 죽이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도중에 매복하였다가 암살을 꾀했지만, 화살이 조금 빗나가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소백은 제나라 도읍으로 들어와, 포숙아와 대부인 고혜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 이가 곧 제환공이다. 환공은 왕위에 오르자 군대를 이끌고 노나라로 가서, 규와 관중과 소홀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노나라에서는 두려운 나머지 그 요구에 따랐다. 이리하여 규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소홀은 호송될 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군의 뒤를 따르고, 관중만이 제나라 군대에 인도되었다. 환공은 곧 자기의 목숨을 노린 관중의 목을 자를 계획이었지만, 포숙아가 그것을 말리며 말했다.“왕께서 뜻이 제나라 하나만을 다스리신다면 고혜와 제가 있으니 충분하겠지만, 천하의 패자가 되시기를 바라신다면, 관중을 살려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환공은 그 말에 따라 관중을 대부에 임명하여 국정을 다스리게 했다. 과연 관중은 대재상으로서의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환공을 춘추시대 제일의 패자의 지위에 올려놓았다.환공이 패자가 된 데는 관중의 힘이 컸지만, 원망을 잊어 버리고 관중을 크게 임용하여 마음껏 수완을 발휘하게 한 환공의 도량과 식견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관중이라는 인물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여, 환공에게 강하게 추천한 평생 동안 변함없는 우정을 지속한 포숙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일은 관중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사기> 관안열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나는 전에 가난했기 때문에,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했었는데, 내 몫을 이익의 분배에서 많이 취하였지만, 포숙아는 나를 욕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나는 포숙아를 위하여 어떤 일을 도모하였는데, 도리어 더욱 곤궁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숙아는 나를 바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이익이 되기도 하고 불리한 일고 있다는 것을 알아 주었기 때문이다. 또 나는 일찍이 임금에게 세 번씩이나 벼슬하여 그때마다 쫓겨났다. 그러나 포숙아는  나를 보고 못났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는 세 번 싸워서 세 번 도망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아는 나를 비겁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는 공자 규가 패했을 때, 소홀은 죽었는데도 나는 사로잡혀 욕을 당했다. 그러나 포숙아는  나를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절개를 지키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나타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낳아주신 것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