甘阜鄲之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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甘阜鄲之夢[편집]

(甘阜鄲之夢) 관련 설명[편집]

인생의 일생이란 꿈같이 허무하다는 말  당나라 현종의 개원 19년 경의 일이다. 여옹이라고 하는 늙은 도사가 한단(조나라의 옛 도읍)의 어느 객주에 들어가 쉬고 있으려니까 그 곳을 지나가던 젊은 과객이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고 가려고 들렸다가 이 노인 도사에게 말을 걸어 왔다. 행색이 초라하고 고생께나 한 듯 보이는 이 젊은이의 이름은 노생이라고 했다. 여옹과 인사를 교환하자 노생은 사회 현실에 대한 불평 불만으로 마구 지껄여 대는 것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일을 해도 먹고 입고 살 수가 없다는 따위의 불평이요, 불만이었다. 한바탕 열을 올려 떠들고 나더니 노생은 기운이 빠진 듯 여옹의 베개를 빌려 베고 잠이 들었다.베개는 사기로 만들었으며 양쪽 끝은 굴뚝 모양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 보니 기이하게도 그 구멍이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노생은 이상하게 여기면서 들여다 보니까 그만 그 구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춤주춤 베개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들어갈수록 베개 구멍은 굴뚝 모양 거대해지고 어느덧 그 속에서 훤한 길이 열리었다.길을 따라 얼마를 들어갔더니 이번에는 또 놀랍게도 웅장한 집 한 채가 나타났다. 그 집에서 노생은 청하의 최씨집 딸과 결혼을 했다. 이어 진사 시험에 급제를 하고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순풍에 돛을 단 듯 영전에 영전을 거듭하여 결국 경조윤(서울 시장)이라는 높은 벼슬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관운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았다. 몇 해 후에는 남쪽 오랑캐(이적)의 난리를 진압하는데 적지 않은 공훈을 세웠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도 어사대부 겸 이부시랑이라는 큰 감투를 쓰고 임금의 측근 대신이 되기까지 했다.그쯤에서 노생은 더 높은 출세를 바라지도 않았다. 어쩐지 분에 넘친 지위와 부귀에 속절없이 막연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명이 떨어지는데 천만 뜻밖에도 그것은 단주의 자사로 좌천을 당한 것이다. 자사라면 일개 지방의 원님 정도이니 좌천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당시의 재상과 사이가 나빴던 사실이 화근이었다. 노생뿐 아니라 임금을 파고 도는 파당과의 세력 다툼에서 노생과 가까이 지내던 측들이 모조리 떨려나는 판국이었다.단주로 쫓겨가서 한숨과 울분 속에서 노생은 만 3년 동안을 그래도 말없이 참고 견딘 보람으로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이번에는 호부상서의 자리를 얻었다. 그 자리에서 조심과 요령을 다 했다. 노생은 드디어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여 10년간 임금을 성의껏 보좌하고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칭송을 아끼지 않은 명 재상으로 이름을 떨치었다.그러나 누가 뜻하였으랴. 모든 지위와 명성과 부귀영화가 그렇듯 절정에 달했을 때 노생은 실로 터무니 없는 역적의 누명을 쓰고 하루 아침에 포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유는 변방의 야심을 품은 장수들과 역적 모의에 주동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미 나이도 늙고 몸도 쇠약해진 노생은 마치 날벼락을 맞듯이 영문조차 모르고 집안에서 오랏줄로 묶였다. 끌려가기 전에 노생은 아내와 자식을 돌아보며 탄식했다.“내 고향 산동에 가면 그다지 볼만한 것은 못되지만 몇 식구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입고 살기에는 군색치 않을 만한 전답이었다. 부질없는 공명심이나 출세욕을 버리고 차라리 고향에 붙박혀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들 이런 고생은 모르고 조용히 지낼 수 있었을 것을……. 차라리 그 옛날 남루한 옷을 입고 한단 지방을 떠돌아 다니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 현실과 정치를 비평하고 자신의 불평 불만을 기탄없이 지껄이며 다니던 그 시절이 그립지만 이제 나이는 들고 몸이 늙은 그 위에 또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그저 허무하고 후회할 따름이로다.”탄식과 더불어 단도를 뽑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으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 자살마저 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던지 그와 함께 체포된 사람들은 모조리 사형을 당했지만 노생만은 옥에 던져진 처지이지만 별다른 고생을 치르지 않고 얼마 후에는 죽음을 면하고 기주로 유배를 당했다.재상 10년에 과히 인심을 잃지 않았던 덕분이요, 임금을 둘러싸고 있는 궁중 환관들의 각별한 의리와 동정으로 목숨만을 건졌던 것이다. 더욱 다행한 것은 기주로 정배를 가서 몇 해를 외롭게 연명하는 사이에 임금이 노생을 잊지 않고 지나간 사건을 재조사 시켰고 그 결과 사실 무근임이 밝혀졌다. 덕택으로 노생은 또다시 누명을 벗고 조정에 소환되어 중서령이라는 벼슬 자리를 다시금 누리게 되었다. 이어 연국공이라는 칭호를 내려주는 등 임금의 총애가 더욱 두터웠다.아들 5형제도 장성해서 저마다 관도에 올라 고관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들은 또 골고루 명가의 딸들과 짝을 지었다. 노생은 열이 넘는 손자를 보았으며 이제는 그의 일가만으로도 그 당시의 어느 누가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세력을 이루었다.이윽고 늙은 몸에 병이 들어 부득이 관직에서 사퇴하려 했으나 임금이 끝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환관들을 보내어 위로를 하는가 하면 명의와 진귀한 약품까지 보내면서 노생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노생은 더할 나위 없는 호강 속에서 마침내 눈을 감았다.“아------.”큰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번쩍 눈을 떴다. 주위를 살펴보니 노생은 한단의 그 헙수룩한 객주에 누워 있었다. 곁에는 여옹이 쭈그리고 앉은 채 혼자 사색에 잠겨 있었다.객주집 마당에서는 주인이 수수를 삶고 있었는데 아직도 수수가 덜 익은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 그대로였다.“꿈이었구나.”부시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리는 노생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여옹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인생이란 그렇고 그런 거야.”마치 노생의 마음, 아니 꿈속을 따라다니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노생은 한참이나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이어 정신을 차린 그는 여옹에게 절을 하고 감사를 드렸다.“덕분에 인생의 영욕도 빈부도 생사까지도 그 모든 것을 속속들이 경험해 보았습니다. 이야말로 선생께서 나의 허영과 욕심을 남김없이 깨우쳐 주신 것으로 알고 뼛속 깊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거듭거듭 허리를 굽혀 여옹에게 사례한 다음 노생은 쓸쓸히 한단의 거리로 들어갔다고 한다.이상은 당나라 문장의 대가로 이름을 남긴 심기제의 소설 침중기를 요약한 내용이다. 이와 비슷한 설화로서 간단한 것은 이미 육조시대 간보가 지은 수신기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침중기보다 후에 나온 것으로는 역시 당나라 때 소설가인 이공좌가 발표한 소설 남가태수전을 들 수 있으며 명나라의 극작가 탕현조의 남가기라는 희곡이 또한 비슷한 줄거리로 구성된 것이다.하여튼 이 침중기의 설화와 그 주인공 노생의 꿈속의 편력으로 인하여 인간세상의 영고성쇠가 그 얼마나 무상하고 허무한 것인가를 이야기할 때 흔히 한단지몽이라고 일컬어 내려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