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牛一毛 구우일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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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牛一毛 구우일모[편집]

   아홉 구      소 우      한 일      터럭 모  

구우일모(九牛一毛) 관련 설명[편집]

많은 수중의 가장 작은 수  

이릉은 한무제 때 용맹스럽고 싸움 잘하기로 이름난 장수였다.

그가 예하 부대를 거느리고 흉노에 원정을 갔을 때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맨 앞에 나서서 군사를 지휘하는 솔선수범을 보여 주어

그의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흉노의 온 땅을 진동시켰다.


승전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한무제는 매우 기뻐했고 아첨을 하는 대신들은 노래를 불러 황제의 영명하고 인재 등용을 잘 함을 칭송 축하하였다.

이 때 흉노의 선우(한나라때의 흉노의 군장)가 위급해 지자 한나라 군의 몇 십 배가 되는 정예의 병사를 모아 이릉과 죽음의 결전을 치루었다.

이릉의 군대는 수가 원래 적었으나 조금도 두려움을 갖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흉노 대군에 겹겹이 에워 싸였어도 피를 흘리면서 분발하여 싸웠다.

그러나 끝내 중과부적(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대적하지 못함)으로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전군이 거의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이릉이 포로로 잡힌 것이다.


이릉은 원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끊으려고 했지만 전사한 부하 전우들의 죽음을 보고 그냥 죽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반드시 복수를 하기로 결심하고 치욕을 참고 투항하여 기회를 보아 공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릉이 패전하여 항복하였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무제는 분노에 넘쳤고 저번에 축하를 했던 무리들은 이릉이 무능하고 불충하였다고 꾸짖었다.


이때 무제는 아무 말 없이 한쪽에 서 있는 태사공 사마천에게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이릉과는 동료였으나 별로 깊게 사귀질 못했다.

그러나 이릉의 사람됨을 꽤 존경하는 터이라 이릉이 결코 아무 까닭없이 투항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또 그 많은 문무대신들이 한 사람도 이릉을 위해 얘기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제왕 앞에서 의리에 입각한 직언을 솔직이 아뢰었다.

“이릉은 불과 5천의 기마병으로 흉노의 수십만 마병에게 둘러 싸였었으나 그래도 십여 일을 견뎌 싸웠습니다.

마지막엔 활촉이 떨어지고 군량이 없었고 빠져나갈 길 마져 차단되어 전투를 멈춘 것입니다.

이릉은 정말로 투항한 것이 아니고 기회를 엿보아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그 동안 쌓은 공로는 실패의 죄를 탕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무제가 이릉을 위해 변명하여 비호해 주는 그의 말을 듣고는 분노를 참지 못해 사마천을 하옥시키라고 명령하였다.

다음 해, 이릉이 흉노를 위해 병사를 훈련시키고 있다는 잘못 전해진 소식을 들은 무제는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이릉의 모친과 처자를 살해했다.

그리고 사마천에게는 가장 참혹하고 치욕적인 궁형(남성의 상징을 제거하는 형벌)을 내렸다.


사마천은 뒤에 막역한 친구 임소경에 한 통의 서신을 써 보냈는데 이 편지에 그 사건의 사연과 치욕을 참으면서도 삶을 택한 이유를 자세히 밝혔다.

그가 참기 어려운 형을 받고 극단적인 치욕을 받으면서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잊으려 했으나 그가 쓰고 있던 사기를 아직 완성치 못해 심사 숙고 끝에,

죽음이란 태산같이 무겁고 기러기의 털같이 가벼운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처럼 이름도 없는 관리가 설사 자살이든 타살이든 삶을 끊더라도

‘아홉 마리 소 몸에서 털 한 개’가 떨어지는데 불과하여 죽어 봤자 개미 한 마리가 죽는 것처럼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치욕을 견뎌 삶이 잇는 동안 쓰라린 고난을 무릅쓰고 완강히 공전(空前)의 위대한 역사 저서 <<사기(史記 )>>를 지어낸 것이다.

태사공 사마천은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