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將功成萬骨枯 일장공성만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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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將功成萬骨枯 일장공성만골고[편집]

   한 일      장수 장      공 공      이룰 성      일만 만      뼈 골      마를 고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 관련 설명[편집]

장수가 공을 세우면 그 그늘에는 살이 썩어 뼈만 남는 수가 헤아릴 수가 없다 

대당(大唐)이라고 하여 그 문화를 한창 피고 있는 모란에 비유했던 당대(唐代)도 마침내 쇠락(衰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정의 사치는 심해지고 세금은 하늘을 찔렀다. 각지에 반란이 일어났다.

그 진압비(鎭壓費)를 마련하기 위해 세금은 더욱더 무거워졌다.

지방정치는 문란해지고 생활 근거를 잃은 백성들은 각처로 유랑하며 산림에 숨어 도둑이 되었다.

이 경향은 점차 심해져, 희종황제 시대에는 마침내 당의 토대를 뒤엎는 큰 물결이 되어 거칠게 휘몰아쳤다.하북(河北)에서 일어난

왕선지는 산동으로 침입하여 정부군을 닥치는 대로 격파했다.

황소가 이에 응하여 다시 산동을 짓밟았다. 주림에 견디다 못한 민중들이 반란에 가담하여 그 군대는 눈사람처럼 부풀어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에 달했다.

얼마 후 왕선지는 쓰러졌으나, 별군인 황소는 뿌리 깊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산동, 하남으로부터 호북을 향한 그 군대는 왕선지의 잔군을 합치고

다시 서쪽 광동을 찌르고 마침내 창을 돌려 북상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패했지만 그 군대는 땅에서 솟아나듯 재생했고 마침내 양자강을 건너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을 함락시키려는 기세를 보이게 되었고, 천하는 온통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각지의 장군이나 절도사들은 제각기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야 「영웅적인 공명을 세워 부귀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황소군에서 이탈하여 후에 당실(唐室)을 멸망시킨 주전충과 후의 진왕(晋王)인 이극용도 그 속에 있었다.

싸움과 배반, 혼란된 정세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이름도 없는 민중은 그 토지가 결단나고 혹은 군대로 끌려가 백골이 되고

또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유랑하고 있었다.이 무렵 희종의 건부 6년, 즉 기해년에 노시인 조송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온 강산이 전쟁터가 되었네. 生民이 무슨 計가 있어 초소(樵蘇)를 즐기겠는가? 군에게 부탁하노니 봉후(封侯)를 말하지 말라.

일장공성(一將功成)에 만골고(萬骨枯)라네.”이것을 다시 쉽게 풀면, “강회(江淮)의 산도 강도 이제는 전화에 휩싸여 버렸다.

나무를 베고 고기를 잡는 서민의 한가로운 생활이 어찌 이어질 수 있겠는가? 그대여, 제후에 임명되느니 뭐니 하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다고,

장군이 공을 세워 제후가 된다는 그 그늘에는 뼈가 되어 썩어 가는 이름도 없는 몇 만이란 사람이 있다네…”여기서 「일장공성(一將功成)」이란 말이 쓰이게 되었다.

떠 멀리 섬서 서쪽에서 흉노와 싸우는 변방사람들을 진도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맹세컨대 흉노(匈奴)를 소탕하겠다고 몸을 돌보지 않고, 5천의 초금(貂錦),

호진(胡塵)에 잃는다. 가련(可憐)하다. 무정하변(無定河邊)의 뼈. 아직도 이 춘규몽리(春閨夢裏)의 사람.”

이것을 다시 쉽게 풀면,

“맹세하고 흉노를 무찌르겠다고 몸을 돌보지 않고 나아갔다. 그러나, 5천의 군사들은 변경의 모래먼지 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금은 무정하 기슭에 가련한 뼈만 남았을 뿐. 아아, 지금도 고향에 남아 있을 그 처자들은 봄날 꿈결 속에 아직도 그리운

모습들을 찾고 있으련만……”무훈에 빛나는 장군의 그늘에 또 화려하게 핀 문화나 정치 그늘에, 이와 같이 해서 말라버리는 만골이 있었을 것이다.

군사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쩡쩡거리는 장관이나 부호 뒤에도 고생으로 꿈틀거리는 그림자는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