遠交近攻 원교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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遠交近攻 원교근공[편집]

   멀 원      사귈 교      가까울 근      칠 공  

원교근공(遠交近攻) 관련 설명[편집]

천하통일의 지도원리  전국시대 때 진나라 소양왕의 재상이었던 장록(원명은 범수)이 어느 날 진 소양왕으로부터 궁 안으로 들어와 만나줄 것을 약속받았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소양왕의 어머니 선태후의 동생인 양후가 재상의 지위를 차지하여 절대적인 세력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형편이었다. 세력이 그쯤 되자 양후는 호시탐탐 제나라를 침공해서 자기의 영토를 넓힐 계획을 굳혀가고 있었다.장록이 궁에 들어 가 소양왕을 배알 하고자 길을 가던 노상에서 소양왕이 맞은 편에서 가마를 타고 오고 있었다. 그러나 장록은 공손히 맞이하거나 길을 비킬 생각도 없이 대담하게도 의연히 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때 임금님의 행차를 안내하고 앞장 서 오던 태감이 그를 보고 비켜 서라고 소리쳤다.“대왕님의 행차시다”“뭐라고요? 진나라에도 대왕이 있습니까?” 하고 장록이 대답했다. 이렇게 옥신각신 떠들고 있는 것을 본 소양이 가마에서 내려 장록 앞으로 걸어왔다. 그래도 장록은 큰 소리로 외쳐댔다.“진나라에는 다만 태후, 양후만이 있을 뿐이지 어디 대왕이 있단 말이오?” 이 말은 소양왕의 가슴을 찌른 말이다. 그러나 소양왕은 겸손한 태도로 장록을 정중히 궁 안으로 모셔갔다. 소양왕이 장록을 궁 안으로 모신 후 좌우 사람들을 물러나도록 하고 단 둘이 앉은 자리에서 장록에게,“지략이 뛰어나신 선생의 지도를 바라고자 합니다.”장록은 대답이 없었다. 진왕이 대답이 없는 장록을 향해 다시 청했다.“선생의 하교를 바랍니다.”장록이 여전히 함구 불현이라 세번째로 안타까운 내색을 지으면서 물었다.“설마 선생은 이 사람이 지도해 줄 만한 사람이 못 되어서 그러십니까?”이 때 장록이 입을 열었다.“옛날에 강태공이 문왕을 뵙고 진언했던 바 문왕이 이를 받아 들여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비간은 주왕을 뵙고 진언하였은즉 주왕이 듣기는 커녕 오히려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건 무슨 까닭입니까? 한 사람은 임금의 신복을 받았었고 한 사람은 임금의 신복을 받지 못 한 까닭이 아닙니까? 오늘 소인은 대왕과 아무런 깊은 교정도 없는데 소인에게 참고될 말을 하라 하시는 뜻이야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교천언심(交淺言深)이라 사귐은 얕더라도 의견은 듣습니다. 소인은 또한 비간과 같이 살신의 화를 자초할까 두려워 대왕께서 세 번씩이나 물으셨어도 가히 입을 벌려 말씀을 못 드린 것입니다.”그러나 진왕이 말하되,“내가 선생의 인겨과 재능을 우러러 보아 좌우 사람들도 물리쳐 보내고 이렇게 간절히 선생의 지교를 바라고 있으는 것이니 위로는 태후로부터 아래는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솔직이 무슨 일이든 가르쳐 주시면 반드시 선생의 뜻을 받들어 행할 것입니다.”그러자 장록은 서슴없이 대왕께 충간을 하였다.“오늘 날 진나라의 지위를 놓고 볼 때 어느나라가 이 같이 많은 천연의 병풍이 있습니까? 진나라의 병력을 볼 때, 어느 나라가 이 같이 방대한 병마를 갖추고 강대한 사병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또 진나라의 백성을 볼 때, 이 같이 기율을 잘 지키고 나라 사랑하는 백성을 어느 나라가 감히 따를 수 있겠습니까? 진나라를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가 제후를 영도하여 중국을 통일할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이런 포부를 지니시고 십여 년간 노력해 오셨습니다만 이렇다 할 성취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진나라가 이 제후와 맹약을 맺었다가 저 제후와는 싸움을 하는 등 근본적으로 일괄적이 정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인이 듣긴엔 근래 대왕께서 무장들의 제언에 따라 제나라를 칠 작정이라는데…”“그게 무슨 잘못이 있소?”장록은 이어“가까운 한나라와 위나라를 뛰어 넘어서 그렇게 먼 제나라를 공략한다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다. 소수의 병력을 동원해 본다 하더라도 제나라는 끄덕도 안 할 것이며 그렇다고 한꺼번에 많은 병력을 출동시키고 보면 진나라 자체를 위해서 이롭지 않은 경우를 또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가능한 한 자기 나라의 병력을 아끼면서 한․위 두 나라 군사를 전면적으로 끌어 내자는 계획을 가지신 것으로 알지만 겉으로는 우호를 부르짖고 형식적으로는 동맹을 맺었다손 치더라도 정작 유사시에는 반드시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바에야 내 나라를 허술하게 비우고 다른 나라를 건너 뛰어 먼 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아무래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일찌기 제나라의 민왕이 낙의(樂毅)의 군사에게 패했던 원인을 보더라도 진나라가 멀리 떨어진 초나라를 쳐들어 왔기 때문에 가까운 동맹국들의 부담이 너무 커서 배반을 했던 게 아닙니까? 결국에는 제나라 민왕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실속을 차리기는 위나라와 한 나라들입니다. 역적에게 군졸을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나누어 준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취할 방법으로는 먼 데에 있는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데 있는 나라를 정벌한다는 원교근공책(策)이 가장 이상적이고 실속 있는 방도라고 생각합니다. 한 치의 땅을 얻으면 그것이 임금의 촌토요, 한 자의 땅을 얻으면 그것이 임금의 척지(尺地)가 아니겠습니까? 이해 득실의 이치가 이렇듯 명백한데 구태여 먼 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은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이렇게 깨우쳐 주었다.그리하여 장록은 일약 진나라의 객경(客卿)이라는 어마어마한 대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재상으로 임명이 되고 더우기 응후(應侯)라는 칭호까지 받고 진나라의 군사 관계를 도맡아 보았다.그 후로 「원교근공책」은 진나라의 국시(國是)가 되었으며 급기야는 중국의 천하통일을 이룩하게 한 지도원리의 역할을 다 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