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里霧中 오리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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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里霧中 오리무중[편집]

   다섯 오      마을 리      안개 무      가운데 중  

오리무중(五里霧中) 관련 설명[편집]

거리가 5리나 되는 안개 속과 같이 희미하고 애매하여 길을 찾기 어려움의 비유  


환관이나 외척이 정치를 좌우하던 후한의 환제 때 성도 출신 장패라고 하는 학자가 있었다.

장패의 아들 장개도 역시 춘추, 고문상서 등에 능통한 학자로써 그는 문하에 학도 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버지 때로부터의 제자들이 그의 문하로 계승되었다.

수레와 말이 거리를 메우고 그를 옹위하는 동반자들은 황금빛 물고기의 비늘과 같이 번쩍거렸다.

조정 환관들과 임금의 친척들도 장개와 교분을 위해서 애를 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작고한 아버지와 같이 그러한 교제나 거래를 싫어 하여 나중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예(현 치안국장격)가 무재 관리 시험에 합격한 사람으로 보통 수재 -- 후한에서는 시조 광무제의 이름이 유수였던 관계로 수자를 삼가하고 무재로 돌려 불렀다 -- 를

천거해서 장릉의 지방 장관으로 임명했으나 거절하고 번거로움을 피해서 홍농산 깊은 골짜기로 은거해 버렸다.


많은 학자들이 그를 따라 갔으므로 그가 사는 곳은 언제나 저자를 이루었다 한다.

다시 후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공주시가 생기기까지 했으니 가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그렇게 되면 더욱 기용하여 벼슬자리에 앉히고 싶은 것인 사람의 마음이다.

중신들은 몇 번이나 현량방정으로 천거했으나 끝끝내 장개는 응하지 않았다.

화제에 이어 상제․안제가 죽고 다음 임금으로 즉위한 순제는

특히 하남지방의 장관들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장개는 행 함에 있어서는 원헌 공자를, 아량은 자사를 따르려 하며 지조에 있어서는 백이와 숙제에 버금가도다……」

하고 극구 칭찬하며 예를 갖추어 맞아 들이려 했으나 장개는 이 때에도 병을 빙자하여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장개는 학문 뿐만 아니라 도술도 좋아해서 능히 오리무를 지었다. 즉 방술을 써서 5리나 되는 거리를 완전히 뒤덮는 안개를 일으키게 했다.

그 당시 관서 태생의 배우라는 사람도 역시 방술의 명인으로서 3리에 걸친 넓이의 안개를 일으키는 실력을 지녔으나 장개가 5리나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제자로 올 뜻을 보였지만 장개는 몸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오리무중이라는 말은 오리무에 중을 합친 것으로 처음부터 중이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방 5리에 가득찬 안개 속에 있으면 동서남북 방향조차 분간하지 못하니 갈피를 못잡고 앞 길이 아득하여 실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쩔쩔 맨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요컨대 세상 사물을 놓고 확실한 방침이 서지 않았다든가 마음이 갈팡질팡 헤맨다든가 하는 것에 비유해서 사용되고 있다.

황제가 지남철 수레를 마들어 안개 속에서 방향을 탐지하여 적군을 격파했다는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중국의 알맞는 고사라 하겠으나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다시 안제가 죽고 다음 임금이었던 북향후가 반년만에 또 죽고 순제가 왕위에 올랐을 때 배우가 안개를 피워놓고 못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체포되었다.

이때 배우가 장개에게서 방술을 배웠다고 거짓 진술을 한 탓으로 장개는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2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옥중에서도 열심히 경서를 탐독하고 상서의 주를 짓는데 세월을 보냈다.

나중에야 사실무근으로 석방되어 환제의 건화 3년에 이르러 다시 조정의 초빙을 받았으나 여전히 병을 이유로 사절하고 70세에 세상을 떠났다.